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진=한겨레]

글쓴이는 촛불집회와 관련해 강준만 교수를 비판한 바 있다. 6월 17일 올린 글 포스팅에서 <강준만의 ‘촛불’ 시선, 실용적 글쓰기의 한계>란 제목으로 그의 무미건조함의 글을 못마땅하게 여긴 적이 있다.

강 교수의 글에서 예전의 날카로움은 찾아볼 수 없고 그의 촛불에 대한 시선이 교정돼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강 교수가 기고한 한겨레와 한국일보 칼럼을 보고 한 비판이었다.

당시 강 교수는 6월 8일 한겨레 칼럼 <촛불시위의 교훈>에서 “공직자가 영혼이 없어 MB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말리지 못했다”고 함으로써 촛불의 원인을 ‘영혼에서 찾는’ 한 참 빗나간 모습을 보였다.

강 교수는 또 6월 11일 <서울의 축복과 저주>란 한국일보 칼럼에서 한국사회를 진단하는 자신의 이론적 도구인 한국인 특유의 ‘쏠림’현상에 기대어 서울이 단번에 모일 수 있는 밀집형도시란 점, 모든 게 서울에 모여 있는 집중화, 그런 물리적 공간에다 사이버란 무한대의 공간이 겹쳐져 서울의 촛불이 집합할 수 있는 경로를 추적하고 있다.

그러니까 한미 간의 FTA 비준, 그 전제조건으로서의 쇠고기 시장 전면개방, 이후 추가협상 힘겨운 줄다리기, 한미 동맹, 실용외교, 이런 것은 간단히 제외시켜 버렸다고 글쓴이가 비판했다.

강 교수는 시청 광장과 광화문 거리의 촛불이 왜 급속히 불붙을 수밖에 없었는가의 근본적인 원인과 30개월 이상 쇠고기는 절대 안 된다는 절박감이 어느 정도인지 아무런 설명이 없이 자신의 이론적 기제인 ‘서울공화국’이란 것에 몰두하고 촛불이 지향하는 바를 말하기보다는 시공간적으로 어떻게 수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는지 만을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강 교수에게는 기성세대의 잘못으로 10대들이 나오지 말았어야 할 집회이고 왜 그렇게 모일 수 있는가 하는 관찰에서, 서울의 도시구조를 거론하고 그것으로만 그친다고 글쓴이는 지적했다.

그런데 또 한겨레에 칼럼을 냈는데 다시 한번 실망감을 주고 있다. 30일자 <‘정치의 무덤’ 위에 핀 촛불>이란 제목으로 촛불집회를 언급하고 있다. 이 칼럼을 보면 솔직히 강 교수가 요즘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할 정도다.

퇴임 마지막 강의를 한 최장집 고려대 교수의 말을 인용, 촛불집회로 무너진 대의정치, 정당정치를 어떻게 복원할 것인가를 밝히고 있다. MB의 인기도 뿐 아니라 야당의 그것도 10%대에 머물러 정당정치의 꼴이 말이 아니어서 이를 어떻게 복원할 것인가 나름의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강 교수는 그러니까 MB와 야당의 ‘인기 없음’을 같은 도마에 올려놓고 보고 있다. 설령 여야가 인기가 없고 MB가 인기가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MB와 야당을 같은 선상에 볼 수 있는지 그 단순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강 교수는 이런 정당정치의 사망선고를 극복하기 위해 세 가지 의제를 제안하고 싶다고 하는데 기간당원제의 대안, ‘집단적 응징 투표’ 현상의 개선 방안, 국회의원이 되는 것이 출세로 여겨지는 풍토를 바꿀 방안을 모색해 보면 어떨까하고 글을 맺는다.

강 교수의 촛불집회에 대한 의견이 정말 이 정도 선에서 그치는 것인지 이상하다할 정도로 메마르다. 쉽게 말해 강 교수는 촛불집회의 원인과 성격에 대해선 짚지 않고 한국 정당정치, 서울공화국이란 틀에서 바라본다.

어떻게 촛불이 정치의 무덤 위에서 피었다는 것인지 설명도 없다. 촛불이 국민의 생명안전을 위해 자발적으로 붙여졌다는 것을 강 교수는 모르는가, 그리고 MB가 미국을 방문, 한미 정상회담 전, 쇠고기 협상이 졸속으로 이뤄졌고 왜 그렇게 되어야만 했는지 모르는가, 아니면 애써 외면하는 것인가. 이에 대해 강 교수는 가타부타 언급이 없다. 아무리 공간의 제약이 많은 칼럼이라지만 이 부분에 대해 한 줄 언급이 없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다. 솔직히 일부 외면하는 것 같기도 하고 이론적 지평이 이를 담아내지 못하는 부분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생긴다. 촛불이 밝히고 지향하는 바를 보지 않고 엉뚱한 측면에서 이를 지켜보는 것 같아 그간 강 교수에게 호감을 갖고 있던 사람들에게 실망감을 다시 안겨주고 있다.

Posted by 정진탄



왜 미국 농무부는 광우병으로부터 소비자들의 생명안전권을 보장하지 않느냐 하는 미국 언론이 있어 주목된다. 워싱턴포스트와 뉴욕타임스, 월스트리트저널에 비해 결코 그 영향력이 떨어진다고 할 수 없는 로스앤젤레스타임스(LA Times)가 19일자(현지시간) 사설에서 미국 농무부를 다그쳤다.

‘USDA mad cow madness’란 제목의 사설에서 한 쇠고기업체의 뜻있는 일을, 왜 쓸데없는 일로 만드느냐며 농무부의 말도 안 되는 행위를 중단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쇠고기업체 ‘크릭스톤팜스’(Creekstone Farms)가 전체 소의 1%도 안되는 농무부의 광우병 검사를 못 믿겠으니 자체적으로 첨단실험실을 세워 테스트를 하려고 했으나 농무부가 법원에 항소까지 하면서 이를 막는다는 게 도대체 할 짓이냐고 묻는다.

크릭스톤팜스에 얽힌 얘기는 글쓴이도 소개했고 이후 국내 언론 여기저기에서 소개돼 어느 정도 알려져 있지만, 이를 미국 유력언론이 사설에서 정면 비판하는 수준까지는 없었다.

로스앤젤레스타임스는 USDA가 이 업체에게 이같은 광우병검사를 허용하지 않는 것은 이유가 무엇이냐고 따진다. USDA가 주장하는 것처럼 미국산쇠고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으면 이를 허용하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느냐고 말한다. 한국이 정말 묻고 싶은 것을 잘 대변하고 있다. 그러면서 광우병과 관련이 없다면 또 다른 이유, 그러니까 다른 업체들이 검사비용 부담 등을 우려해 이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어서 그러느냐고 다시 지적한다.

한국과 일본이 저렇게 미국산쇠고기 안전에 대해 못 믿어 하는데, 그래서 크릭스톤팜스가 이같은 우려를 불식하기 위해 자체적으로 광우병검사를 하려고 하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소비자들의 안전권을 보장하려고 하는데, 왜 막고 못하게 하느냐며 USDA의 미친 짓을 꾸짖는다.

그리곤 이렇게 양심적인 얘기를 한다. 크릭스톤팜스와 같은 업체들이 광우병을 검사하도록 해서 한국 등 다른 나라들에게 미국산쇠고기를 수출하게 되면 수익도 늘어게 될 일을 농무부가 나서 미국산쇠고기 기준을 강압적으로 이들 나라에게 받아들이도록 하고 있다며 부조리를 질타하고 있다.

이런 것 때문에, 즉 약자를 괴롭히는 미국의 쇠고기외교로 인해 고객을 확보하기는커녕 한국에서처럼 적개심을 부르고 있고, 이러는 사이에 호주는 쇠고기 시장을 잠식해가고 있다고 비판한다. 제발 농무부는 일을 제대로 하라고 충고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한국 촛불집회로 한국정부뿐 아니라 미국 언론과 미국 정부에게까지 큰 영향을 주고 있다. 특히 부시 행정부의 잘못된 농무 시스템을 개선하는데도 막대한 도움을 주고 있는 셈이다.



USDA mad cow madness
The agency's refusal to let firms test for the disease denies consumers a safety net.
June 19, 2008
<LA Times Editorials>

When is a worthwhile test for mad cow disease not worthwhile? According to the U.S. Department of Agriculture, it's when a private company uses the test.

At least, that's part of the argument the USDA has been using to keep a beef producer from screening the carcasses of all its cattle, saying that although the federal agency relies on the rapid-screen test for high-risk cattle, the test would be "worthless" in the hands of Creekstone Farms.

Knowing that customers, especially foreign ones such as Japan and South Korea, remain wary of the USDA's spotty screening program, the Kansas meat company has been fighting the agency for four years for the right to use the state-of-the-art testing lab it built. The rapid-screen test is not completely accurate, but it has been useful enough for the USDA to employ. Creekstone still would not be able to legitimately label its products as free of bovine spongiform encephalopathy, the technical term for mad cow disease, but its customers should have the choice of deciding whether the extra screening is worth paying for.

The USDA contends that private testing is unnecessary and that its own program, which tests fewer than 1% of cattle, adequately protects the public from mad cow. This might well be true. There is no known instance of U.S. beef causing a case of the human variant of the disease. But as long as the test presents no threat to animal or human health, why shouldn't an innovative company give customers what they want? The USDA's motivation probably has more to do with the beef industry's opposition to Creekstone: Testing might put consumer pressure on other companies to do the same.

https://ecf.dcd.uscourts.gov/cgi-bin/show_public_doc?2006cv0544-22 its first battle in court, but the USDA appealed; a ruling is expected soon. Meanwhile, instead of letting farms like Creekstone grow their businesses, the United States has been trying to persuade or strong-arm foreign countries into accepting U.S. beef standards, with limited success. Its recent deal with South Korean President Lee Myung-bak led to massive street protests. And while our bullying beef diplomacy reaps enmity instead of customers, Australia is increasing its market share.

The USDA has had enough problems in recent years making sure that companies meet its safety requirements. It ought to get that job done, and not interfere with producers that are going above and beyond to provide the safety standards some consumers want.

Posted by 정진탄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진=뉴시스]

조용히 있는 지식인들에게 차라리 고마움을 느낀다. 촛불을 섣불리 규정하는 좌우 쪽의 지식인들이나 그의 주변에 대해선 뭐랄 수 없는 반감이 느껴진다.

촛불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꼭 이데올로기로 덮어씌우려는 성급함에 먼저 피로감이 든다.

촛불을 연계해 정권퇴진운동이 가능할까, 아닐까하는 고민은 소용없는 고민이다. 그것은 촛불만이 안다. 개 풀 뜯는 소리가 아니다.

‘촛불을 연계해 정권퇴진투쟁론이다, 아니다’ 논의자체로도 촛불정신을 오히려 훼손할 수 있으니 되도록 삼갔으면 한다.

촛불’은 그대로, 무정형인대로 놓아두는 게 좋다는 판단이다. 학술적 접근까지야 막을 수는 없다 해도 그래도 가능한 한 이상하게 규정하지 말고 놓아두는 편이 좋다고 본다.

이데올로기 관성의 법칙인 듯 꼭 새로운 사회적 아젠다가 돌출되면 좌우란 괴팍한 논리적 개념으로 재단을 하려고 한다.

촛불은 한국사회가 진귀하게 찾은 사회적 시원(始原)같은 것이다. 숨 막히는 민주화 투쟁이후 가까스로 찾은 우리사회의 순수한 열정의 결정체랄 수 있다.

정권퇴진운동으로 불길이 확산된다 해도 이것이 아니다 싶으면, 그러니까 민주화 이후 걸러진 우리사회의 순수성을 훼손한다 싶으면 촛불은 저절로 꺼진다. 또 그 반대편에서 순수성을 훼손할라치면 지금처럼 성난 불꽃이 될 수도 있다.

시청 광장에 타는 촛불은 자정능력과 절제력이 있는 촛불이다. 정권퇴진 운동 과정에서 부당함을 보면 오히려 그 반대편에서 평화를 기원하는 촛불이 타오를 것이다. 우리의 촛불은 그런 촛불이다.

이번 촛불을 우매한 촛불로 보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막스 베버를 거론하며 천민민주주의라고 한 한나라당 주성영 의원은 한국의 이번 촛불이 정작 막스 베버가 말하는 ‘이념형’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 우리사회의 부정한 곳을 비추는 하나의 준거 틀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 무지의 소치다.

소설가 이문열씨는 “촛불장난이 오래가면 델 것”이라고 거의 북한수준의 위협론을 상기시키는 발언을 하고 있는데, 그도 그렇게 성만 낼일 아니다.

이번 촛불은 MB정부의 소통 정도에 따라 그가 말한 것처럼 정말 애들이 하는 촛불 소꿉장난으로 끝날 수 있지만 반대편에서 그런 식으로 맞불장난을 오래하면 큰불이 날 수 있음을 동시에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이씨의 맞은 편에 있는 사람들도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촛불을 이용하려고 해선 정말 데일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다.

이들을 규탄하는 촛불집회가 열리지 말란 법도 없다. 이번 촛불은 좌우 투쟁의 장에서 벗어나, 그런 것에 지배받지 않는, 소중하게 켜진 촛불이라는 점을 인식했으면 한다.

촛불이 이데올로기적 투쟁에 동원될 운명이라도 되는 것처럼 투쟁에 이용해야 한다, 말아야 한다는 식의 논쟁도 은연중에 촛불을 도구로 놓고 볼 위험성을 키워, 되도록 삼갈 필요가 있다.

‘이쯤 했으면 됐다, 아니다’란 식으로 촛불을 마치 동원 가능한 수단쯤으로 사고하는 기계론적 사고를 접었으면 하는 것이다.

이번 한국의 촛불은 과거의 논리나 시선으론 잘해야 절반 밖에 못 보거나 설명할 수밖에 없는 독특한 것이다. 좌우의 배후를 용납하지 않는 무정형이다. ‘촛불이성’이란 새로운 선물이 한국사회에 선사된 것이다.

Posted by 정진탄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진=한겨레]

강준만 (전북대 신방과)교수의 글을 읽고 난데없이 모래알을 연상했다. 찰진 맛은 없고 그저 푸석푸석한 그런 질감을 느끼게 했다. 강 교수가 최근 한겨레와 한국일보에 기고한 칼럼에 ‘촛불’을 싣고 있어 읽어봤더니 그런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트레이드마크인 지역감정에 대한 논객으로서 과거 프로페셔널함은 왠지 찾아보기 힘들었고 평범했다. 평범하다 함은 ‘선진국이기 되기 위해선 우리 국민들이 선진국민이 되어야 한다’식의 힘 빠진 언어들의 조합이 많았다는 점에서 그렇다.


원래 자타가 공인하듯 강 교수는 워낙 실용적 글쓰기에 앞장섰던 탓에, 다시 말해 아카데믹한 글을 조롱하듯 대중적인 글쓰기를 통해 인기를 얻어왔기에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아직 많다.


허나, 촛불을 향한 그의 무미건조한 실용적 글쓰기는 심히 부적절하다는 생각도 생각이거니와 그의 시각이 무엇인지 새삼 묻게 한다. 그는 6월 8일 한겨례 칼럼 <촛불시위의 교훈>에서 공직자가 영혼이 없어 MB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말리지 못했다고 말해버리고 만다.


“내각과 참모는 대통령의 최악의 결정엔 브레이크를 걸어야 한다. 이론은 그렇다. 대통령은 신(神)이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게 가능한가? 가능하지 않다! ‘영혼 없는 공직자’라는 말은 농담이 아니라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이명박 정부에만 국한된 게 아니다. 역대 모든 정권은 물론 한국 사회 전 분야에 걸쳐 관철되고 있는 사실이다. 그간 우리는 그 문제를 지도자 탓으로만 돌리는 오류를 반복해 왔다. 이번 사태의 원인도 이 대통령에게서만 찾으면 마음은 편해질지 몰라도, ‘영혼 없는 공직자’라고 하는 사실엔….”


영혼이 없는 공직자가 많아서, 미국산 30개월 이상 쇠고기를 수입하기로 결정했고, 그래서 촛불집회를 하게 됐다? 한미 간의 FTA 비준, 그 전제조건으로서의 쇠고기 시장 전면개방, 이후 추가협상 조건의 힘겨운 줄다리기, 한미 동맹, 실용외교, 이런 것은 간단히 제외시켜 버리고 영혼이 없는 공직자의 문제라고? 여기서 강 교수가 가리키는 영혼이란 종교적인 뜻에서 그런지, 어떤 것인지 구체적인 설명이 없다.


강 교수가 6월호 월간 ‘인물과 사상’에서 <‘1학년1학기’를 넘어서 : 정치교육의 일상화가 필요하다>란 제목의 칼럼에서 밝히 듯 정작 강 교수 자신이 단순화를 해도 너무 단순화하는 매우 부적절한 논법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다. 강 교수는 이 칼럼에서 정치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대학교 1학년1학기를 맞아 책 몇 권 읽고 세상을 단순화 시켜보는 운동권 학생들을 비판해가는 글을 쓰고 있다. 혹 강 교수 본인도 촛불을 그런 식의 시선으로 보고 있는 것 아닌지 다시 묻고 싶다.


강 교수는 한겨레 칼럼의 첫 문단을 이렇게 시작한다.

 

“촛불시위와 관련해 ‘10대 예찬론’이 쏟아져 나오는 걸 지켜보면서 마음 한구석이 영 불편하다. 부모가 했어야 할 일, 해야 할 일을, 10대 자녀들이 발 벗고 나서서 해결하려는 게 아닌가. 미안하고 죄스러울 뿐, 잘한다고 칭찬하는 건 민망한 일이다. 나이가 많고 적음을 떠나 사회적으로 각자 맡은 일들이 있을 텐데, 그들이 촛불시위를 하게 만든 일은 기성세대의 책임이 아닌가.”


10대들이 촛불을 든 게 기성세대의 책임이라고? (‘강부자’ ‘고소영’ 등 MB가 어떤 식의 국정을 펼쳤는가를 강 교수도 잘 알 것이다.) 그러니까 광장에서 그렇게 촛불을 들지 말고 학교로, 집으로 돌아가라고? 다시 말하지만 ‘정치교육의 일상화’를 주장했던 강 교수가 ‘색다른’ 주장을 하고 있어 고개를 갸웃거리게 한다. 촛불집회는 더 할 나위 없이 훌륭한 정치교육의 장이 아닌가. 중고생, 초등생, 하다못해 유치원생, 유모차까지 동반하고 참가하는 주부나 아줌마들을 못 봤다는 것인지, 강 교수의 눈에는 이들이 그저 미안하게 생각되는 대상들뿐인 것인지 매우 놀라운 발언을 하고 있다.


강 교수는 또 6월 11일 <서울의 축복과 저주>란 한국일보 칼럼에서,


“지방도시에서의 시위 활성화는 쾌적한 시위 공간이 있느냐 없느냐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뿐인가. 미디어의 보도도 매우 중요하다. 이게 있어야 더 재미가 있다. 즉, ‘시위의 축제화’를 이룰 수 있는 최소한의 아날로그적 여건이 마련돼 있지 않으면 아무리 디지털 쌍방향 소통이 잘 이루어져도 자발적 참여자를 불러 모으긴 어렵다는 것이다. 전주의 어느 음식점에서 밥을 먹다가 텔레비전을 시청하던 누군가가 “나도 저런 곳에서 시위 한 번 해 보고 싶어”라고 하는 말을 듣고 해본 생각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부산 촛불집회 사진=뉴시스]

한국사회를 진단하는 자신의 이론적 도구인 한국인 특유의 ‘쏠림’현상에 기대어 서울이 단번에 모일 수 있는 밀집형도시란 점, 모든 게 서울에 모여 있는 집중화, 그런 물리적 공간에다 사이버란 무한대의 공간이 겹쳐져 서울의 촛불이 집합할 수 있는 경로를 더듬는다.


시청 광장과 광화문 거리의 촛불은 과연 이런 것으로 급속히 불붙었나. 30개월 이상 쇠고기는 절대 안 된다는 절박감은 밝히지 않고 아예 언급을 하지 않는다. 자신의 이론적 메카니즘인 서울공화국이란 것에 전력한다. 촛불이 지향하는 바를 말하기보다 어떻게 그렇게 시공간적으로 수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는지만을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강 교수에게는 기성세대의 잘못으로 10대들이 나오지 말았어야 할 집회이고 왜 그렇게 모일 수 있는가 하는 고찰에서, 한국 서울의 도시구조를 그 틈에서도 지적하고 싶은 것이다. 강 교수와 촛불은 그만큼 거리가 있고, 그렇게 안 어울려 보인다.


하물며 시위하는 서울의 환경이 지방의 그것보다 더 낫기 때문이라는 지적 앞에선 할 말을 잃게 한다. 다른 사람 같으면 그렇게까지 황당하거나 당황스럽지 않을 것이지만 강 교수의 지적이기에 놀랍다. 전 국민이 촛불을 들고 염원하는 이유를 몰라 그런 발언을 하는 것인지 강 교수식 어법대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신문방송 전공 학자로서 강 교수는 이번 촛불집회에서 통상문제는 아니더라도 MB의 소통부재를 규명해야 할 것이란 기대를 갖는 것은 지나친 욕심일까. 아무리 서울 독식구조가 못마땅한 강 교수일지라도 촛불집회에 대한 칼럼에서 본질과 한참 비켜난 말만 되풀이하고 있는 것을 보고 거북하지 않을 수 없다. 강 교수의 실용적 글쓰기는 권위적인 텍스트를 깨부수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현실 정치의 권위주의까지 흔드는 상당한 호평을 얻었으나 이번 촛불에 대한 그의 입장은 큰 실망감을 안겨준다. 향후 달라진 모습을 기대해 본다.

Posted by 정진탄


미국 의회에서 쇠고기 안전성을 점검하는 청문회를 추진하려 했으나 한미 정부가 반대해 열리지 못한 것으로 뒤늦게 밝혀졌습니다.


미국정부가 반대하는 것이야 그렇다 쳐도 어찌 한국정부가 이럴 수 있답니까. 미국정부가 이런 한국정부를 어떻게 여겼을까요.


한국정부는 안전성을 검증하다 보면 다시 논쟁에 휩싸이기 때문에 아예 이를 차단하기 위해 만류했다고 합니다.


지난달 말쯤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촛불집회 등 미국산 쇠고기 안전성이 들끓자 미국 하원에서 청문회를 열어 객관적으로 증명하면 어떻겠느냐고 했더니 미국정부와 한국정부가 그러지 말라고 했다고 합니다.


객관적으로 증명을 해도 시원찮은 판에 극구 이를 말리려고 했다니 어안이 벙벙합니다. 우리 한국 측에서 청문회를 요구한 것도 아니고 미국 의회에서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16일 뉴시스 워싱턴 특파원에 따르면 미국 하원 아시아태평양소위원회 에니 팔레오마베가 위원장과 한인사회 모 회장이 미국산 쇠고기의 안전이 한국인뿐만 아니라 미국인들에게도 중요한 사항인 만큼 안전에 이상이 없는지 여부를 객관적으로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는 판단에 따라 청문회를 추진했다가 양국 정부가 반대해 추진이 중단된 상태라는 것입니다.


이 청문회는 당초 양국 정부의 관리는 물론 민간 수출입업체의 안전관계자, 독립적인 민간연구소의 쇠고기 전문가 등이 참석해 미국산 쇠고기 전반과 광우병 등과 관련해 안전을 점검한다는 방침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미국 의회에서 선정한 한 인사는 한국 정부에 청문회를 개최할 경우 참석할 수 있는 전문가를 추천받기 위해 접촉을 시도했던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쇠고기 협상의 미진한 점을 논의해왔던 양국 정부는 의회가 쇠고기의 안전문제를 다시 처음부터 거론할 경우 자칫 걷잡을 수 없는 논란에 빠질 우려가 커 의회에 자제를 요청했다는 것입니다.


한인사회의 한 인사는 "한국정부 측은 미국 의회의 이 같은 움직임에 대사관을 통해 반대의 뜻을 전한 것으로 안다"고 했답니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어느 날 갑자기 통상장관 회담을 열어 30개월 이상 쇠고기를 들여오지 않겠다고 한국정부가 떼를 쓴다고 미국 측 입장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미국의 입장은 어떻겠습니까. 미국 측을 옹호하자는 것이 아니라 한국정부의 협상 태도를 한번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미국이 한국을 얼마나 우습게 봤을까를 말입니다.


그러나 뒤늦게 나마 촛불이 타올라 미국 측도 앗 뜨거워라 했을 것이니, 협상 결과를 두고 봅시다. 16일 3차 협상을 안 하겠다고 한 미국이 귀국하려던 김종훈 본부장을 다시 붙잡아 며칠 더 논의를 하자고 했으니, 어떻든 뭐가 나오기는 나올 것으로 보입니다만은.

Posted by 정진탄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진=뉴시스]

굳이 언급을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으나 주말판 한 관변언론의 칼럼에 ‘위대하고 끔찍한’ 이라고 밝힌 소설가 이문열씨의 촛불집회 규정을 인용하고 있는 게 눈에 띄었다.


미국에 있던 이씨가 초한지 발간 홍보차 가진 최근 기자들과의 만남에서 촛불집회를 위대하면서 끔찍한 것이라고 한 것에 대해 정말이지 조악한 역사인식에 코미디도 아닌, 또 그런 것에 대해 한국 언론은 고스란히 옮기는, 옮겼으면 다른 작가의 코멘트라도 곁들여 균형이라도 이룰 것을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왠지 거기서 끝내버리는 보도에 대해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그런데 그것을 입맛대로 인용하기 시작하고 있어, 한명이라도 더 나서 차단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보수 이데올로그랄 수 있는 이씨의 말은 교묘했다. 그러나 역사인식은 없었다.


이씨는 한국의 정치적 무브먼트(movement)를 거의 중국 문화대혁명 당시의 ‘훙웨이 핑’(紅衛兵 홍위병)틀로 재단한다. 이 범주에서 그의 국가적 인식론은 영웅과 졸이 있고 제왕과 민초만 있다. 뿐만 아니라 남미식 포퓰리즘을 원용해 ‘디지털 포퓰리즘’이라고 하면서 자신과 생각이 다르거나 반대쪽은 포퓰리즘으로 가둬놓는다.


그러니까 그는 20세기적 사고에 기대고 시선은 항우와 유방, 고조선, 기원전 시대에 두고 있다. 영웅호걸, 천하의 풍운아들, 난세와 모략, 술수가 난무하는 것에 그 뼈대를 두고 있는 것이다. 보기에도 서러운 어린이아의 촛불의 외침은 수없이 왔다가 스러져가는 민초들의 하잘 것 없는, 그 무엇쯤에 위치한다.


이씨는 그냥 문학적 소설만을 썼으면 좋으련만 소설같은 정치적 발언을 한다. 문학적 소설 속에 위대하면서도 끔찍한 이라는 표현을 쓰든 어떻든 그것은 그것대로 문학적 테두리 내에서 가용한 것이다. 그러나 소설 속에 뛰쳐나온 위대하면서도 끔찍한 이라는 표현은 전혀 문학적이지 않다. 그는 정말 이 표현을 쓰고 싶었으면 MB 100일은 끔찍하고도 끔찍한 이라는 전제를 깔고 말을 해도 했어야 했다.


이씨야 말로 관변언론의 지원에 힘입은 문학적 포퓰리즘의 수혜자라면 수혜자다. 자신의 영혼이 깃든 문학적 작업을 포퓰리즘이라고 한다면 매우 불쾌하게 느낄 것이나, 시청 광장에서 만사 제쳐놓고 촛불을 들고 미국산 쇠고기를 규탄하는 한 샐러리맨의 순수한 영혼도 문학적 영혼보다 값졌으면 값졌지 더 못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촛불을 들고 서있는 초등생이 미국에서 초한지를 쓰고 있는 이씨보다 역사 인식이 앞섰으면 앞섰지 뒤쳐지진 않는다.


위대하면서도 끔찍하다? 이씨도 촛불 뒤의 배후를 의심하는 모양인데 제발 그런 꽉 닫힌 사고는 하지 말기를 바란다. 어떤 모략가나 권모술수가가 음모를 꾸며 불순한 세력의 침투를 시도하는, 기상천외한 초한지 스타일의 이야기는 촛불은 취급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지만 촛불은 초한지나 기존 사회과학으로 좀체 설명하기 어려운 한국 현대사의 ‘제3세력’이다. 곁가지로 빠지는 말이지만 이런 점에서 경향신문이 16일부터 개최하는 ‘촛불과 한국 민주주의’ 시국 토론회는 매우 시의적절하며 의미 있는 행사랄 수 있다. 기회가 닿으면 한국 민주주의 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에서의 파장과 전망도 함께 하는 자리가 마련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물론 이것은 이번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이 미국에서 돌아와 발표하는 협상 내용에 따라, 촛불정국의 향배가 잡히고 한미 관계, 국제통상 측면에서의 논쟁도 더불어 촉발할 수 있는 계기가 곧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촛불은 위대하면서 끔찍한 것이 아니라 위대하면서도 끔찍이 위대한 것이었다. (글쓴이는 이렇게까지 말을 하고 싶지 않다. 다만 이씨의 발언에 대응하기 위해 수사학적으로 쓰겠다). 이씨가 언제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10 몇 년전 쯤이나 됐을까, 한 방송국 프로그램에 나와 시끄러운 시국에 대해 한마디 부탁한다는 사회자의 질문에 국민 모두 각자 제자리로 돌아갔으면 한다고 해 그럴싸한 문학적 울림을 주었다. 이제 그 말을 되돌려 주고 싶다. 이씨는 되도록 정치적인 발언을 피하고 문학이나 소설로 돌아갔으면 한다. 그 바운더리를 벗어나려거든 일그러진 역사 인식을 21세기 촛불정국으로 되돌려놓고 그랬으면 한다.

Posted by 정진탄


소설가 조경란씨가 촛불은 눈물 꽃이고 꽃말은 우리 삶이라고 했다.(14일자 한겨레 2면) 그리곤 어느 날 책상물림 글쟁이가 광화문에 서서 순수한 염원을 이뤄내는 꿈을 꾼다고 했다.


386일 것으로 추정되는 조경란씨는 민주화운동을 참여하지 못한 것에 대해 나름의 고백을 하며 촛불현장에 있는 자신에 대한 글을 써내려간다.


“이 촛불은 눈물을 닮은 것 같다. 아니 혼자 타면서 혼자 꿈꾸는, 속으로 애태우면서 조용히 타오르는 인간 본래의 모습. 촛불, 이것은 되기 어려운 일을 되게 한 ‘도구’가 아니며 먹는 것을 하나의 빌미로 삼아 시작된, 뿔처럼 단단해진 국민의 감정과 분노도 아니다.

먹고 사는 문제가 달린, 그것을 가능하게 해달라는 순수한 염원과 기원을 담은 ‘붉은 꽃’이다. 세상은 고통과 소통의 부재로 가득하지만 또한 그것을 이겨내려는 의지로 가득 차 있기도 하다. 다리도 아프고 눈도 뻑뻑하고 배도 고팠다. 날이 밝기 시작했고 나도 촛불을 껐다. 자발적으로 시작된 비폭력 집회였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저기 어디쯤 집으로 가는 버스가 있을 것이다.“


투쟁이기 보단 염원이었고 기원이었다. 최루탄이 난무하던 민주화 투쟁이 아니라 광화문에서 온 국민이 소통하는 과정이었고 그걸 하나로 느끼는 과정이었다.


어쩜, 차별과 투쟁을 용해하고픈 뜨거운 열정의 장이다. 철학자이며 과학자인 가스통 바슐라르는 <촛불의 미학>에서 몽상적인 언어로 촛불을 난해하고도 시적인 언어로 예찬한 바 있다. 그가 만약 서울 광화문 거리의 한국 촛불을 봤다면 <촛불의 미학을 너머로>란 또 다른 저서를 내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해 본다.


촛불은 사회과학을 뛰어넘는다. 기존의 사화과학적 사고로 해석하기엔 뭔가 하나 빠진 느낌, 매우 중요한 요소의 부족함을 느낀다. 차별의 문제가 아니라 용해의 문제이며 지배의 문제가 아니라 일체감의 문제이며 권력투쟁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투쟁을 넘어선 문제이다.


MB정부는 쇠고기 문제를 자꾸 대결의 문제, 지배의 문제, 권력의 문제로 본다면 결코 성공할 수 없으며 갈수록 나락에 빠지는 꼴을 보게 된다는 의미다. 전직 대통령 노무현의 업적이나 과오를 딛고만 간다면 필연적으로 덜미를 잡힐 수 있다. 쇠고기 수입은 이 정권의 문제이기 전에 전 정부에서 비롯됐다고 사유한다면 해결책을 결코 찾을 수 없게 돼 있다. MB는 봉하마을을 못 찾아갈 이유가 없으며 노무현씨도 청와대의 명박산성을 넘어가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현재 한국 내부의 권력자들의 모습은 이것을 못보고 있다. 그 주위세력도 이걸 권하지도 또는 인식을 못하고 있다. 때문에 촛불은 쉽게 꺼지지 않는다. 촛불은 끊임없이 대결의 간극을 메우기 위해 광장에 나서게 된다. 조중동을 비롯한 연합뉴스, 네이버, KBS 등 주요 언론기관을 컨트롤 한다고 해서 대결의 장에서 승리한다고 생각하면 역사를 잘못 인식한 것이다.


또 이 촛불은 지금은 보수수구 계층에게 향해 있지만 때가 되면 반대편인 진보세력에게도 얼마든지 향할 수 있다. 권력투쟁의 장엔 필연적으로 국민적 저항의 틈을 주게 돼 있다. 그곳엔 어김없이 촛불이 등장할 것이다.


한국의 촛불집회는 세계의 사회과학자들에게 새로운 과제를 안겨주었다. 주지하다시피 새로운 형태의 직접민주주의를 선보이고 있다. 고대 도시 광장에서처럼 첨단 장비를 동원한 국민들이 각각 촛불 하나씩 들고 자신의 의사를 표출하는 모델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미국이나 서방에서 유학한, 대의민주주의 제도에 파묻혔던 식자들에게는 촛불집회를 분노의 집회로 규정, 이제 국회에 맡기라는, 대의민주주의로 돌아가자는 말을 하며 역사적 인식론의 진부함을 반복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자신의 인식론적 지평을 넓힐 생각은 안하고 말이다.


이런 한국의 촛불은 그 어떤 과거의 사회과학적 인식론으론 설명을 다 할 수 없다. 어느 한 계급에 의한 투쟁으로도, 보수를 질타하는 진보란 인식만으론 일정 부분 성과를 거둘 수는 있어도 지속적인 성과를 거두기 어렵다. 촛불 뒤의 배후를 찾아보려 해선 보이지 않는다. 촛불은 그 정체를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차이’나 ‘차별’의 시각을 갖고 있는 사람에겐 그 모습을 보여주진 않는다. 촛불은 언어 이전의, 이성으로 설명하기 힘든 것이다. 조경란씨의 표현을 빌리자면 “혼자 타면서 혼자 꿈꾸는, 속으로 애태우면서 조용히 타오르는 인간 본래의 모습”이랄 수 있을까.


촛불은 이처럼, 말하자면 이데올로기적 사회과학이 아니라 ‘시적인 사회과학’이고 ‘사회과학적인 시’인 난해하지만 일단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는 그런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촛불을 색깔론이 난무한 사회과학으로 끄려해선 결코 꺼지지 않으며 지극히 인간적인, 전율과 감동의 몸서리가 없이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다시 삶의 질감이 거칠어지고 무미건조함을 느끼면 다시 촛불은 타게 된다.


마지막으로 권하고 싶다. MB는 청와대 한 켠에서 전깃불을 끄고 촛불을 켜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란다. 촛불은, 인간의 언어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이상한 느낌을  줄 것이다.

Posted by 정진탄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이 ‘굿잡’을 해낼지 그의 방미 결과에 초미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14일 수전 슈워브 USTR 대표와의 1차 만남은 탐색전에 그쳤다. 다음주 월요일까지 간다는 계산이기 때문에 좀 더 기다려봐야 할 듯하다. 그 결과가 좋지 못할 땐, 그러니까 30개월 이상 쇠고기 수입에 대한 원천적인 봉쇄를 하지 못할 땐, 촛불은 어떻게 번질지 예측할 수 없다.


그러나 어떻든 일각에선 촛불이후를 제기하고 있어 그냥 지나칠 일만은 아닌 것 같다. 6.10이후 촛불은 효순-미선 추모, 6.15를 맞거나 지나면서 이데올로기 투쟁에 불을 댕길지 어떨지 의견이 분분하다. 언론들은 중대기로, 분수령에 있다고 하면서 내심 촛불집회 피로감을 헤아려 보고 있다.


모르긴 몰라도 김 본부장은 가시적인 조치를 갖고 올 것으로 예상된다. 지금까지 30개월 이상 쇠고기 금지 대안 중에서 가장 믿을만할 것으로 보인다. 때가 때인 만큼 어쭙잖은 대책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한국정부나 미국정부는 잘 알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미국정부는 재협상이나 추가협상이라는 말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고 있어 재협상 수준을 기대하는 것은 어렵다. 잘해야 양국 정부가 어떻게든 업자들의 자율규제를 지원하는 형태로 밖에 다른 방법이 없는 듯 양측은 확인하고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진=뉴시스]


그럼 이제 한국 촛불참가자들에게 남는 선택은 크게 3가지이다.

첫째, 자율규제-정부지원 안을 받아들이는 쪽이다.

둘째, 재협상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며 이를 관철할 때까지 무기한 집회를 갖는 쪽이다.

셋째, 자율규제-정부지원 안을 일단 수용하되, 이후 단행되는 청와대-내각 인적 쇄신 등 정부의 향후 정국 운영을 관망하자는 쪽이다.


첫 번째 쪽은 30개월 이상의 쇠고기와 특정위험물질이 들어오지 않기만 하면 된다는 다소 현실적인 입장을 갖고 있는 부류다. 그 수가 어느 정도일지는 모르겠지만, 많지는 않을 것같고 반대로 없지도 않을 것 같다. 어쨌거나 MB 정부에 이래저래 큰 타격을 입힌 만큼 가닥을 추리자는 쪽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두 번째 쪽은 재협상이 아니면 절대 수용할 수 없다는 명분 아래 강경한 입장을 보이는 세력이다. 재협상이 아니면 정권퇴진 구도 속에서 움직이는 쪽이다. 애초 촛불집회는 재협상이었기 때문에 계속 밀어붙여도 전혀 어색할 일이 아니지만 ‘촛불의 동력’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어 현실적인 고민도 뒤따를 것으로 보인다.


세 번째 쪽은 재협상을 얻어 내지 못했지만 현실적으로 쇠고기 30개월 이상이 안 들어온다는 신뢰성이 있다면 기다려볼 필요가 있다는 입장이다. 더불어 이후 이뤄질 정부 인사 등 인적 쇄신책을 예의주시하겠다는 쪽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정부가 하시라도 국민들의 기대를 저버리거나 과거 무소통의 행태를 재연할 경우 이들은 즉각 거리로 나가 촛불을 들겠다는 입장이다.


아무래도 두 번째와 세 번째 쪽에 대다수 일 것으로 점쳐진다. 그러나 변수는 김 본부장이 들고 오는 보따리이다. 이에 따라 그 향배가 갈릴 것으로 보인다. 이번에 또 국민을 실망시킬 땐 촛불은 정치, 이데올로기 세력화 그룹에게 옮겨갈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러니까 납득할만한 수준일 경우 반대로 촛불의 열기는 낮아질 가능성이 없지 않다.


허나, 김 본부장이 재협상 수준의 만족할 만한, 신뢰할 만한 내용을 보여준다고 해도 촛불이 완전히 사라질 것으로 보는 것은 MB정부식 단견이다. 설사 재협상을 했다손 치더라도 촛불은 언제든 광장에 나오려는 경향을 보일 것이다. 기존 미디어를 누르고 첨단 테크놀로지로 무장한 세력이나 정치적 참여 훈련을 한 학생, 주부 등은 자신들의 의사표출을 상시화 할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이걸 억누를 것은 아직 없어 보인다.


한 달 넘게 타오른 촛불은 한국의 뒤틀린 곳을 바로잡고 승화시켰다. 좌우파만 있는 게 아니고 새롭게 규정돼야 할 ‘제3의 촛불세력’도 있음을 보여줬다. 지긋지긋한 친미-반미 구도를 벗어나 이렇게 재단하는 것을 비판하는 ‘무미(無美)세력’도 있음을 확인시켜줬다. 타깃이 쇠고기이지  미국이고 아니고가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촛불은 우리사회가 사회적 합의 속에 올바른 길을 갈 때 잠시 수그러들 것이지만 쇠고기 협상에서 보인 국민무시 행태를 반복하거나 과거회귀식 집권스타일이 또 나타날 경우 촛불은 다시 그 ‘진가’를 발휘 할 것이다. 따라서 촛불이후는 다시 촛불 밖에 없다.

Posted by 정진탄

미국에서도 드디어 촛불이 밝혀진다. 가슴 뭉클하지 않을 수 없다. 해외에서 촛불집회가 없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미국에서의 촛불집회는 매우 의미가 크다 하겠다.


집회는 미국 현지시간으로 7일로 잡혀 있다. 맨해튼 32가에서 열리는 이번 촛불집회는 미국 최대도시 뉴욕에서 개최된다는 점에서 미국 국내뿐 아니라 전 세계에도 반향이 클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재협상 불가를 버시바우 대사를 통해 흘려보내고 있는 미 행정부에게도 크나큰 타격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뉴욕에서 촛불시위가 열리는 것은 지난 2003년 12월 미군에 의해 희생된 효순-미선 양 추모 모임이후 5년만의 일이다.


특히 이번 뉴욕 촛불집회를 기화로 워싱턴, 로스앤젤레스 등 다른 지역으로 확산될지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뉴시스 뉴욕특파원에 따르면 재미한인 네티즌들은 ‘헤이코리안’과 ‘미시 유에스에이’, ‘미즈빌’ 등 미주한인사회 웹사이트게시판을 통해 한국의 촛불 시위과정에서 무력진압으로 부상자가 발생하는 등 일련의 사태에 대해 분노와 우려를 표명하며 본국의 촛불시위를 성원하는 미주한인들의 촛불시위를 열기로 결정, 이에 대한 동참을 독려하고 있다.


이들 네티즌들은 지난 3일 ‘헤이코리안’의 클럽 ‘크사니’에 ‘뉴욕촛불(NYcandle)’이라는 카페를 개설하고 ‘한국촛불시위를 지지하는 뉴욕뉴저지 한인모임’을 결성했다.


뉴욕의 촛불시위는 최근 한 네티즌이 본국의 촛불시위를 반대하는 비판의 글을 올린 것이 계기가 된 것으로 알려졌다.


찬반 댓글이 이어지는 등 뜨거운 논쟁거리가 된 상황에서 또 다른 네티즌이 맨해튼에서 촛불시위를 갖자고 제안해 일부 네티즌들이 적극 찬동하면서 급진전됐다.


지지 모임의 일원인 강경희(34)씨는 뉴시스와의 전화인터뷰에서 “준비 모임을 갖자는 제안을 한지 하루만인 2일 맨해튼에서 처음 13명이 모였는데 22세 대학생부터 교환학생과 주부, 50대 목사님까지 다양했다”고 밝혔다.


이들은 촛불집회에서 ‘자유발언대’를 마련해 개인의 자유로운 의사표명을 적극 유도할 방침이다.


또 집회에 참가하지 못하는 이들이 보내온 1인 촛불시위 사진들과 한국의 촛불시위 사진들을 전시하고 동영상 상영도 병행하기로 했다.


시위 계획이 인터넷을 통해 퍼지면서 워싱턴 D.C. 등 타지역 네티즌들과 일부 대학의 한인힉생들도 합류 의사를 표명하고 있다.


촛불시위 지지모임측은 카페 개설 하루만에 100명의 회원이 등록되는 등 동참의지가 뜨겁다고 전하고 이날 집회에 300-400명이 모일 것으로 예상했다.

Posted by 정진탄

미국은 한국에게 좋은 국가인지 나쁜 국가인지 구분하기 힘들어진다. 좋은 점도 있겠고 나쁜 점도 있겠다. 그러나 요즘 미국을 좋아할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이 맞는 말일 것이다.

한 가지 더 지적할 점이 있다. 미국이 이상해지고 있기 때문에 한국은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안 될 것으로 보인다. 한미관계를 제대로 정립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미국은 적대국 북한에겐 우호적으로 변해가고, 동맹국 한국에겐 불량하게 다가오고 있어 매우 헷갈리게 하고 있다.

북한은 약속대로 한다면 핵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