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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8/06/30 강준만 교수에게 다시 한번 실망하며 (4) by 정진탄
  2. 2008/06/17 강준만의 ‘촛불’ 시선, 실용적 글쓰기의 한계 (3) by 정진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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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한겨레]

글쓴이는 촛불집회와 관련해 강준만 교수를 비판한 바 있다. 6월 17일 올린 글 포스팅에서 <강준만의 ‘촛불’ 시선, 실용적 글쓰기의 한계>란 제목으로 그의 무미건조함의 글을 못마땅하게 여긴 적이 있다.

강 교수의 글에서 예전의 날카로움은 찾아볼 수 없고 그의 촛불에 대한 시선이 교정돼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강 교수가 기고한 한겨레와 한국일보 칼럼을 보고 한 비판이었다.

당시 강 교수는 6월 8일 한겨레 칼럼 <촛불시위의 교훈>에서 “공직자가 영혼이 없어 MB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말리지 못했다”고 함으로써 촛불의 원인을 ‘영혼에서 찾는’ 한 참 빗나간 모습을 보였다.

강 교수는 또 6월 11일 <서울의 축복과 저주>란 한국일보 칼럼에서 한국사회를 진단하는 자신의 이론적 도구인 한국인 특유의 ‘쏠림’현상에 기대어 서울이 단번에 모일 수 있는 밀집형도시란 점, 모든 게 서울에 모여 있는 집중화, 그런 물리적 공간에다 사이버란 무한대의 공간이 겹쳐져 서울의 촛불이 집합할 수 있는 경로를 추적하고 있다.

그러니까 한미 간의 FTA 비준, 그 전제조건으로서의 쇠고기 시장 전면개방, 이후 추가협상 힘겨운 줄다리기, 한미 동맹, 실용외교, 이런 것은 간단히 제외시켜 버렸다고 글쓴이가 비판했다.

강 교수는 시청 광장과 광화문 거리의 촛불이 왜 급속히 불붙을 수밖에 없었는가의 근본적인 원인과 30개월 이상 쇠고기는 절대 안 된다는 절박감이 어느 정도인지 아무런 설명이 없이 자신의 이론적 기제인 ‘서울공화국’이란 것에 몰두하고 촛불이 지향하는 바를 말하기보다는 시공간적으로 어떻게 수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는지 만을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강 교수에게는 기성세대의 잘못으로 10대들이 나오지 말았어야 할 집회이고 왜 그렇게 모일 수 있는가 하는 관찰에서, 서울의 도시구조를 거론하고 그것으로만 그친다고 글쓴이는 지적했다.

그런데 또 한겨레에 칼럼을 냈는데 다시 한번 실망감을 주고 있다. 30일자 <‘정치의 무덤’ 위에 핀 촛불>이란 제목으로 촛불집회를 언급하고 있다. 이 칼럼을 보면 솔직히 강 교수가 요즘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할 정도다.

퇴임 마지막 강의를 한 최장집 고려대 교수의 말을 인용, 촛불집회로 무너진 대의정치, 정당정치를 어떻게 복원할 것인가를 밝히고 있다. MB의 인기도 뿐 아니라 야당의 그것도 10%대에 머물러 정당정치의 꼴이 말이 아니어서 이를 어떻게 복원할 것인가 나름의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강 교수는 그러니까 MB와 야당의 ‘인기 없음’을 같은 도마에 올려놓고 보고 있다. 설령 여야가 인기가 없고 MB가 인기가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MB와 야당을 같은 선상에 볼 수 있는지 그 단순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강 교수는 이런 정당정치의 사망선고를 극복하기 위해 세 가지 의제를 제안하고 싶다고 하는데 기간당원제의 대안, ‘집단적 응징 투표’ 현상의 개선 방안, 국회의원이 되는 것이 출세로 여겨지는 풍토를 바꿀 방안을 모색해 보면 어떨까하고 글을 맺는다.

강 교수의 촛불집회에 대한 의견이 정말 이 정도 선에서 그치는 것인지 이상하다할 정도로 메마르다. 쉽게 말해 강 교수는 촛불집회의 원인과 성격에 대해선 짚지 않고 한국 정당정치, 서울공화국이란 틀에서 바라본다.

어떻게 촛불이 정치의 무덤 위에서 피었다는 것인지 설명도 없다. 촛불이 국민의 생명안전을 위해 자발적으로 붙여졌다는 것을 강 교수는 모르는가, 그리고 MB가 미국을 방문, 한미 정상회담 전, 쇠고기 협상이 졸속으로 이뤄졌고 왜 그렇게 되어야만 했는지 모르는가, 아니면 애써 외면하는 것인가. 이에 대해 강 교수는 가타부타 언급이 없다. 아무리 공간의 제약이 많은 칼럼이라지만 이 부분에 대해 한 줄 언급이 없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다. 솔직히 일부 외면하는 것 같기도 하고 이론적 지평이 이를 담아내지 못하는 부분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생긴다. 촛불이 밝히고 지향하는 바를 보지 않고 엉뚱한 측면에서 이를 지켜보는 것 같아 그간 강 교수에게 호감을 갖고 있던 사람들에게 실망감을 다시 안겨주고 있다.

Posted by 정진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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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한겨레]

강준만 (전북대 신방과)교수의 글을 읽고 난데없이 모래알을 연상했다. 찰진 맛은 없고 그저 푸석푸석한 그런 질감을 느끼게 했다. 강 교수가 최근 한겨레와 한국일보에 기고한 칼럼에 ‘촛불’을 싣고 있어 읽어봤더니 그런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트레이드마크인 지역감정에 대한 논객으로서 과거 프로페셔널함은 왠지 찾아보기 힘들었고 평범했다. 평범하다 함은 ‘선진국이기 되기 위해선 우리 국민들이 선진국민이 되어야 한다’식의 힘 빠진 언어들의 조합이 많았다는 점에서 그렇다.


원래 자타가 공인하듯 강 교수는 워낙 실용적 글쓰기에 앞장섰던 탓에, 다시 말해 아카데믹한 글을 조롱하듯 대중적인 글쓰기를 통해 인기를 얻어왔기에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아직 많다.


허나, 촛불을 향한 그의 무미건조한 실용적 글쓰기는 심히 부적절하다는 생각도 생각이거니와 그의 시각이 무엇인지 새삼 묻게 한다. 그는 6월 8일 한겨례 칼럼 <촛불시위의 교훈>에서 공직자가 영혼이 없어 MB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말리지 못했다고 말해버리고 만다.


“내각과 참모는 대통령의 최악의 결정엔 브레이크를 걸어야 한다. 이론은 그렇다. 대통령은 신(神)이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게 가능한가? 가능하지 않다! ‘영혼 없는 공직자’라는 말은 농담이 아니라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이명박 정부에만 국한된 게 아니다. 역대 모든 정권은 물론 한국 사회 전 분야에 걸쳐 관철되고 있는 사실이다. 그간 우리는 그 문제를 지도자 탓으로만 돌리는 오류를 반복해 왔다. 이번 사태의 원인도 이 대통령에게서만 찾으면 마음은 편해질지 몰라도, ‘영혼 없는 공직자’라고 하는 사실엔….”


영혼이 없는 공직자가 많아서, 미국산 30개월 이상 쇠고기를 수입하기로 결정했고, 그래서 촛불집회를 하게 됐다? 한미 간의 FTA 비준, 그 전제조건으로서의 쇠고기 시장 전면개방, 이후 추가협상 조건의 힘겨운 줄다리기, 한미 동맹, 실용외교, 이런 것은 간단히 제외시켜 버리고 영혼이 없는 공직자의 문제라고? 여기서 강 교수가 가리키는 영혼이란 종교적인 뜻에서 그런지, 어떤 것인지 구체적인 설명이 없다.


강 교수가 6월호 월간 ‘인물과 사상’에서 <‘1학년1학기’를 넘어서 : 정치교육의 일상화가 필요하다>란 제목의 칼럼에서 밝히 듯 정작 강 교수 자신이 단순화를 해도 너무 단순화하는 매우 부적절한 논법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다. 강 교수는 이 칼럼에서 정치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대학교 1학년1학기를 맞아 책 몇 권 읽고 세상을 단순화 시켜보는 운동권 학생들을 비판해가는 글을 쓰고 있다. 혹 강 교수 본인도 촛불을 그런 식의 시선으로 보고 있는 것 아닌지 다시 묻고 싶다.


강 교수는 한겨레 칼럼의 첫 문단을 이렇게 시작한다.

 

“촛불시위와 관련해 ‘10대 예찬론’이 쏟아져 나오는 걸 지켜보면서 마음 한구석이 영 불편하다. 부모가 했어야 할 일, 해야 할 일을, 10대 자녀들이 발 벗고 나서서 해결하려는 게 아닌가. 미안하고 죄스러울 뿐, 잘한다고 칭찬하는 건 민망한 일이다. 나이가 많고 적음을 떠나 사회적으로 각자 맡은 일들이 있을 텐데, 그들이 촛불시위를 하게 만든 일은 기성세대의 책임이 아닌가.”


10대들이 촛불을 든 게 기성세대의 책임이라고? (‘강부자’ ‘고소영’ 등 MB가 어떤 식의 국정을 펼쳤는가를 강 교수도 잘 알 것이다.) 그러니까 광장에서 그렇게 촛불을 들지 말고 학교로, 집으로 돌아가라고? 다시 말하지만 ‘정치교육의 일상화’를 주장했던 강 교수가 ‘색다른’ 주장을 하고 있어 고개를 갸웃거리게 한다. 촛불집회는 더 할 나위 없이 훌륭한 정치교육의 장이 아닌가. 중고생, 초등생, 하다못해 유치원생, 유모차까지 동반하고 참가하는 주부나 아줌마들을 못 봤다는 것인지, 강 교수의 눈에는 이들이 그저 미안하게 생각되는 대상들뿐인 것인지 매우 놀라운 발언을 하고 있다.


강 교수는 또 6월 11일 <서울의 축복과 저주>란 한국일보 칼럼에서,


“지방도시에서의 시위 활성화는 쾌적한 시위 공간이 있느냐 없느냐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뿐인가. 미디어의 보도도 매우 중요하다. 이게 있어야 더 재미가 있다. 즉, ‘시위의 축제화’를 이룰 수 있는 최소한의 아날로그적 여건이 마련돼 있지 않으면 아무리 디지털 쌍방향 소통이 잘 이루어져도 자발적 참여자를 불러 모으긴 어렵다는 것이다. 전주의 어느 음식점에서 밥을 먹다가 텔레비전을 시청하던 누군가가 “나도 저런 곳에서 시위 한 번 해 보고 싶어”라고 하는 말을 듣고 해본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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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촛불집회 사진=뉴시스]

한국사회를 진단하는 자신의 이론적 도구인 한국인 특유의 ‘쏠림’현상에 기대어 서울이 단번에 모일 수 있는 밀집형도시란 점, 모든 게 서울에 모여 있는 집중화, 그런 물리적 공간에다 사이버란 무한대의 공간이 겹쳐져 서울의 촛불이 집합할 수 있는 경로를 더듬는다.


시청 광장과 광화문 거리의 촛불은 과연 이런 것으로 급속히 불붙었나. 30개월 이상 쇠고기는 절대 안 된다는 절박감은 밝히지 않고 아예 언급을 하지 않는다. 자신의 이론적 메카니즘인 서울공화국이란 것에 전력한다. 촛불이 지향하는 바를 말하기보다 어떻게 그렇게 시공간적으로 수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는지만을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강 교수에게는 기성세대의 잘못으로 10대들이 나오지 말았어야 할 집회이고 왜 그렇게 모일 수 있는가 하는 고찰에서, 한국 서울의 도시구조를 그 틈에서도 지적하고 싶은 것이다. 강 교수와 촛불은 그만큼 거리가 있고, 그렇게 안 어울려 보인다.


하물며 시위하는 서울의 환경이 지방의 그것보다 더 낫기 때문이라는 지적 앞에선 할 말을 잃게 한다. 다른 사람 같으면 그렇게까지 황당하거나 당황스럽지 않을 것이지만 강 교수의 지적이기에 놀랍다. 전 국민이 촛불을 들고 염원하는 이유를 몰라 그런 발언을 하는 것인지 강 교수식 어법대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신문방송 전공 학자로서 강 교수는 이번 촛불집회에서 통상문제는 아니더라도 MB의 소통부재를 규명해야 할 것이란 기대를 갖는 것은 지나친 욕심일까. 아무리 서울 독식구조가 못마땅한 강 교수일지라도 촛불집회에 대한 칼럼에서 본질과 한참 비켜난 말만 되풀이하고 있는 것을 보고 거북하지 않을 수 없다. 강 교수의 실용적 글쓰기는 권위적인 텍스트를 깨부수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현실 정치의 권위주의까지 흔드는 상당한 호평을 얻었으나 이번 촛불에 대한 그의 입장은 큰 실망감을 안겨준다. 향후 달라진 모습을 기대해 본다.

Posted by 정진탄